얼마 전 지인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맞이한 일이다 전화 속의 그이 왈 “급히 입급할 일이 있는데 열차로 멀리 이동 중이라 할 수도 없고 통장에 돈은 있지만 공인인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걸 지금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전화주셨네” 한다.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숨이라도 쉬어가면서 말해보라고 주문한다 그랬더니 직장 옆에 집을 하나 분양받으려고 하는데 오늘까지 계약금을 걸어야 하는 거고 문제는 계약금을 입금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아니 궁궐같은 집에서 지금 살면서 또 무슨 집인가?” 하고 농 반 진 반으로 말을 건넨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자꾸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오고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그이는 한다.
며칠 전에도 한 형제가 큰돈을 빌려 달라고 찾아 온 적이 있단다 그래서 “야 그 돈 모으자면 월급쟁이가 몇 년을 모아야 되는지 아는가?” 하면서 지금까지 여러 번 돈이 건너간 그 형제에게 처음으로 거절하고 그냥 돌아가게 한 일도 있다는 거다.
집 사는 이유가 돈 빌려달라는 이들에게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거짓말을 못하는 그이의 성격상 돈을 두고도 여유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할 때 찾아오는 양심의 아픔이라는 걸 맞이할 자신이 그에게는 없기 때문일 거다.
게다가 그 집을 사자면 사실 일정금액에 대해서는 빚까지 져야지 된단다 그도 그럴 것이 직장동료 수천만 원, 직장 상사 수천만 원, 친척들 수천만 원씩 그것도 길게는 20년, 짧게는 3년이 지나가도록 빌려 간 걸 이들이 갚지를 않으니 이제 그이의 형편이 그전과 달라져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살면서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때 “이제 좀 갚지” 하면서 전화하면 좀 있어보라고 하면서 웃다가 전화를 끊게 된다는 이야기를 그이가 한다.
하도 갑갑해서 주위에 철학관 한다는 사람이 있어 공짜로 봐주겠다고 해서 생년월일시를 주었더니 돈은 벌되 쓸 수 없는 팔자라는 것과 금전거래를 하면 안 된다는 두 가지 말을 주었단다 이유는 내 주머니에서 나갈 때는 눈이 있어 나가지만 돌아올 때는 눈이 없어 다시는 내 주머니에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실 철학관 말대로 사주가 그래서 그런지 그이 돈은 떼먹어도 되는 돈이라고 주위에서 다들 생각을 하는지 꿔 준 돈을 돌려받은 걸 그이가 기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는 필자 친척 중에도 땀 흘려 차곡차곡 모은 돈 수십 억 원을 여기저기 빌려 주고 하나도 받지 못해서 지금 삶을 힘겨워하고 있는 이가 있다 그 집 돈은 가져다 쓰고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라는 말까지 주위에서 한다고 하니 그이는 “그런 사람 있으면 나한테도 소개 좀 해 주지”라고 한다.
착한 채권자를 보고 운 좋으면 안 갚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채무자도 없지는 않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본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이다 사회적 자본이 도전받고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도 좋은 사회도 아니다 친한 관계일수록 돈거래는 하지 말라는 말이 있고 친구간 돈거래는 선친이 남기고 간 유언이라는 말을 해서라도 거절하라는 팁을 준다 그러다가 받지 못하면 돈 잃고 친구 잃는다는 말까지도 한다.
사실 그 말도 맞다 혹은 안 맞을 수도 있다 친구란 즐거움을 함께 하는 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돈 갚지 못하고 있는 이가 있을 때 그 상황을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순간 넘어가주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거다 살면서 우리는 자주는 아니라도 불우이웃돕기도 사실 몇 번씩 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못 갚고 있는 이가 “친구가 아니라서”라고 하는 이가 있다면 친구개념을 한 뼘만 확장해 본다면 또 넘어가 주지 못할 것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친구 잃기 싫으면 친구의 어려움을 내가 함께 한다는 생각을 하면 나눔도 실천되고 우정도 더욱 두터워질 테고 남과도 나누는데 친구랑 나눈다는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하면서 우리들이 사고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 지점이 있다면 이거일 거라는 이야기하면서 필자는 또 말한다 “제가 좀 웃겼죠?라고.
사실 필자도 그렇게 못하면서 말로만 한다는 게 웃기는 이야기로 그이에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필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이 왈 “우와! 그런 생각을 다 합니까?”라고 한다 그러면서 누가 배꼽을 간지럽히기라도 하는지 마구 웃어 댄다.
필자의 말에 "너부터 해 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정도로 반응해 주는 그이가 고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문제는 빌려간 이가 형편이 되는데도 돈을 갚지 않고 나쁜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내 마음 속에 들기 시작할 때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악덕채무자도 있고 그에 대처하는 조폭채권자도 있다 그리고 악덕 채무자 때려잡는 기술도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악덕채무자의 신상정보를 영화관에서 상영을 하는 일도 중국에서 있다고 한다.
이런 걸 그이는 알고 있다 사용법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고 있고 그럴 생각도 없고 앞으로도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이 그리워하면서 기다리는 착한 채권자이지 싶다.
필자랑 전화통화한 그이도 가슴 깊은 곳에 멍자국 하나는 있을 거다 누군가 믿음을 앗아갈 때 새겨지는 그런 멍자국 말이다.
계약서 한 장 없이 보는 이 하나 없이 건너간 돈이지만 20년이 지나도록 남들이 한다는 법원 한 번 달려가 본 적 없고 전화해서 조용한 목소리로 “이제 좀 갚지”라고만 하는 그이를 보면 필자의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정작 자신은 법조인이면서 말이다 힘들게 한 지인이거나 친척들이거나 바라보는 그이의 한 쪽 가슴은 지워지지 않을 숯덩이고 한쪽 가슴은 언제 지워질지 모르는 고운 정일 거다.
바라기는 숯덩이는 지우면서 고운 정은 채우면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것이다 혹 꾸어간 이가 형편이 됨에도 불구하고 주지 않기 위해서 재산 감추고 잠적해버리는 날이 온다 해도 말이다.
아쉬움 달래면서 못 참고 달려서 마지막 가을에 서 있다 곧 찾아올 겨울이 그립다.
전정주 경북로스쿨교수 <저작권자 ⓒ 다경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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