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전의 일이다. 춘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구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로 담소를 나누던 기억 말이다. 일몰 때 남한산성에서 본 잠실의 초여름 하늘처럼 검붉은 기억이 가슴을 흔들고 간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20세기를 대표하는 연쇄살인범 30인 중의 한사람으로 뽑힌 그이가 아닐까”라고 대답했다가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의 땡 소리가 고막에 길다란 금을 긋고 가버릴 때처럼 “아니올시다”는 친구의 입술과 마주친다.
무식하고 힘이 세거나 힘이 약하다면 적어도 무식하고 부지런은 해야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한참을 웃는다.
밀림에 사는 원숭이가 하루는 강가를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고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서는 물속의 물고기들을 하나씩 밖으로 꺼내 주었다. 물고기는 원숭이에게 고맙다는 인사할 틈도 없이 남김없이 죽고 말았다.
그 이튼 날은 더 일찍 강가로 가서 물고기를 물 밖으로 꺼내주었다. 그날도 물 밖으로 꺼내어진 물고기는 죄다 죽고 말았다.
헤엄치며 누리고 있는 물고기를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허우적대고 있는 거라고 원숭이는 생각한 것이다. 꺼내 주면 죽고 마는 모습에는 “조금만 더 일찍 꺼냈더라면 살릴 수 있었는데“라는 후회만으로 가득한 것이다. 그래서 예의 그 원숭이가 세상에서는 제일 무서운 존재라는 이야기는 말이 되게 되는 거다.
이에 가만히 듣고 있던 형사법 전공의 모 교수가 말을 걸어 온다. “법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뭔지 아느냐” 기에 기다리는데 “개뿔도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답을 제시한다.
“이유가 뭔고” 하니 “ 천 만원 들여서 재판하고 1억을 지급하라는 판결 받아내 본들 이런 사람한테는 한 푼도 받아낼 수 없으니 이게 무서운 게 아니라면 뭐가 무서운 게 또 있겠는가?”라고 하여 배꼽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웃는다.
불교에서도 말한다. 복을 짓는 일은 보시인데 배고픈 이에게 하는 밥 보시는 복 짓는 일이지만 강도에게 하는 밥 보시는 복 짓는 일이 아니라 범죄를 도우는 일이란다. 밥으로 더 큰 힘을 얻어 더 큰 강도로 나오게 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가르친다. 복을 짓는 보시에도 지혜가 따라야 하고 무식이 없어야 함을 말이다.
봉사에 있어서도 이는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대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하는 봉사는 상대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자신의 가슴은 보람의 샘물로 출렁이게 할 거다. 그러자면 봉사애도 고민이 필요하고 봉사에도 공부가 필요한 거다. 공부가 따르지 않은 봉사는 봉사의 이름으로 상대의 가슴을 고통의 풍랑으로 출렁이게 할 거다.
무식하면 게으르든가 부지런하면 똑똑하든가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 보지만 무식한 데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한 가상의 밀림의 원숭이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에 가슴이 젖어 온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혹 똑똑하고 부지런함이라는 것들이 무식하고 부지런한 밀림의 원숭이의 그 모습은 아닌지 라고.
전정주 경북로스쿨교수 <저작권자 ⓒ 다경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전정주 칼럼 관련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