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옛날로 돌아가야 사람 같이 잘 살 수 있다. 한 마디로 단정하면 우리는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옛것들을 옛날이야기처럼 파묻어 버리고 살아가는 중이다. 옛날로 돌아가서 그 아름다운 풍습들을 꺼내오지 않으면 불행한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죽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다. 대략적으로 한국이 경제적 발전이 시작되기 전에 태어난 1940년생, 1950년생, 1960년생, 길게는 1970년생까지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대들에게는 각자가 아닌 우리라는 맛을 알고 큰 세대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라는 단어를 아직까지 그렇게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 뼈아프게 통감하고 반성하고 그러한 문화를 다시 돌려놓으려고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우리라는 덩어리로 굴러가지 않으면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세대는 각자가 아닌 우리라는 맛을 알고 큰 세대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라는 단어를 아직까지 그렇게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 뼈아프게 통감하고 반성하고 그러한 문화를 다시 돌려놓으려고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한 가구 한 가구가 돈을 벌어서 벌집으로 벌들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듯 의기양양하게 아파트로 한 채씩 입주하여 들어가면서부터 핵가족이 되고, 이웃이 없어졌고, 자연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이 나라 사람들이 불행 해 진 것을 통감하는 마지막 세대가 나서주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우리들은 와 있다.
마당에 쑥갓 상추 올라오는 것에 물을 뿌려 먹여 본 적이 없고, 아버지를 도와서 마당을 쓸어보거나, 가족들 따뜻하게 자도록 군불을 지피거나, 송아지 몰고 돌아다니면서 풀을 뜯어 먹여 본 적이 없고, 쇠죽을 끓여 먹여 본 경험이 없고, 딸들은 밥 하는 바쁜 엄마의 손길을 도와서 조막만한 손으로 곁에 앉아 감자껍질을 까거나 파를 다듬어 주거나, 콩나물에 물을 주면서 입에 들어가는 것을 한 번도 내 손으로 키워 본 적이 없고, 동생들은 엄마 새끼고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요즘 아이들, 동생을 업고 보살펴 본 경험이 없고, 형제 많은 속에서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을 익히고 배울 기회를 잃은 채 성인이 되고,
감자를 심어 본 적도, 심는 구경조차 해 보지 않고, 감자 꽃을 본 적이 없고, 그래서 감자를 찬으로 올리면 젓가락이 가지도 않고 투정을 부리고 편식을 하고, 엄마가 먹으라고 하는 것은 엄마나 먹으라며 모두 뱉어 버리고, 밀가루로 만든 것들만 찾고, 기름에 바짝 튀긴 고소한 맛만 찾고, 슈퍼에서 사 오는 햄과 소시지, 어묵만 찾고, 야채 없이 태워 익힌 고기만을 몸 안에 넣고,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피고 지는 과정을 모두 놓치고, 구청 앞 시멘트 바닥 위에 놓인 화분에서나 보는 꽃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세대, 이들에게 풍부한 인간미를 기대 할 수 없다.
우리가 먹는 고추도 작고 하얀 흰 꽃이 핀다는 것을 모르고, 이웃이 얼마나 눈물겨운 순수한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를 배우지 못하고 자라서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스스로 어른을 알아보고 예의를 다 하는 인격체가 되라고 백날 이야기 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정겨움, 판단력, 솜씨, 인지능력, 상대방을 배려하는 맘, 효심, 이웃 사랑을 기대하려면 먼저 그런 환경 속에 던져 놓고 그런 것을 기대해야 한다.
옛날에는 형제가 많은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눈만 뜨면 노동으로 시작 되는 하루인데 손이 많으면 일이 쉽게 끝나고, 학교를 가더라도 누가 태워주거나 인파 속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서 걸어서 긴 시간을 가려면 형이 살펴 주고 언니가 손잡아 주고 가는 아이하고, 혼자 가는 아이하고 누가 더 좋겠는가? 형이 탈이 나거나 아프면 다리가 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마음이 된다. 그래서 형제가 있으면 좋다는 것을 느끼며 자랐으니 결혼해서도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은 형제가 많으면 내가 가질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형제로 알고 자라면 어른이 되어 많은 아이를 절대 낳지 않는다. 서로 돕고 나누고 행복한 눈 맞춤을 맛보면서 자라지 못한 세대는 부모가 뭘 못 해 주는지 그것만 체크한다.
부모가 하나, 둘을 낳아서 ‘너는 하나뿐인 내 딸이고 하나 뿐인 내 아들이니까 손끝도 까딱하지 마라, 내가 다 해 줄게, 무엇이 부족하니? 무엇을 더 해 주랴? 무엇이 먹고 싶니?’ 아무리 금이야 옥이야 군주로 모시고 여왕으로 모셔도, 이 아이는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고, 더 행복 해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모가 더 못 해 주는 것만 보이고, 불만은 더 많고, 투정도 더 많고, 행복도가 내려 가 있어서 자살을 하지 않으면 천만다행이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것을 다 해주고 키우고 싶은데 그렇게 할 준비가 안 되니 두려워서 결혼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힘들고 부족한 속에서 커다란 인생의 지혜가 있고, 그 속에서 정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행복도 생겨나고, 인간의 소중함도 생겨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여자 아이야 함부로 돌릴 수 없지만, 남자 아이가 나면 친구네 집도 가서 구경하고 살피고, 친척 집에도 가서 방학을 보내고 오고 그렇게 할 때 부모의 소중함을 깨치고 형제의 소중함도 깨치는 아주 좋은 기회를 얻는 것이다.
나와 내 남동생은 초등학생일 때 방학이면 외갓집에 갔었다. 형님이 없고 장남이던 내 남동생은 외사촌 오빠를 따라 다니면서 스케이트도 배우고, 온갖 놀이를 했다. 나는 외사촌 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두 살이 많은 언니 친구들과 윷놀이도 하고, 그 동네에 언니들은 다 만나서 같이 놀곤 했다.
집안 아이들이 방학에 가서 먹고 자고 해도 아무 말 없이 받아주던 수더분한 울 외숙모 같은 분들도 요즘은 보기 드문 것 같다. 부모들이 보내지도 않고, 받아 주지도 않는 문화가 되었으니 얼마나 세상이 변질이 된 것인가?
외갓집 가서 한 일주일쯤 지나고 나면 부모님이 보고 싶어 밤마다 반성을 한다. 매일 곁에 있어서 몰랐던 보고픔을 배운다. ‘아니 내가 울 엄마가 왜 이리 보고 싶은거야?’ 울 엄마 말을 잘 안 들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귀찮게 개구진 미취학 어린 동생들이 보고 싶어서 집으로 갈 궁리를 했다. 심지어 눈이 커다란 우리 집 황소까지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방학 때 마다 집을 떠나보면서 참 많이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기억과 엄마 아빠가 죽지 않고 살아서 나를 다시 맞이하는 기쁨을 해 마다 두 번은 느끼고 살았다.
고향이 댐 공사로 수몰되어 없어지고 몇 십 년 만에 흩어졌던 고향사람들이 300명이 모여서 잔치를 벌린 적이 있다. 방송국에서도 카메라를 들고 몰려오고, 나는 명색이 시인이라도 고향에 관한 시를 낭송하게 되었다. 한석봉이 현판을 썼다는 ‘부라원’이라는 커다란 정자 아래서 잔치를 벌이는데 대문짝만한 나의 시를 프린팅 하여 정자에 걸어 놓고 펄럭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고향 사람들을 보러가면서 나는 일체 화장을 하지 않았다. 나를 기억 해 줄 친구를 기대하면서, 정말 입술 하나 바르지 않고 가서 마이크를 잡고 시낭송을 하는데 목이 콱 메여 낭송을 잠시 못 하는 일이 생겼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낭송을 하는데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많은 따뜻한 이웃들이 먼 세월을 건너서 내 가슴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큰 강물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가득 모여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다가 보면 큰 언니가 강가 얕은 물에 앉혀 놓았던 어린 동생이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강가에서 빨래를 빨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풍덩 달려가서 옷이 다 젖어버리건 말건 내 새끼처럼 꺼내서 껴안고 놀란 아이를 달래주시던 생각, 남의 아이니까, ‘야 이 언니들아, 동생 좀 건져라 외치지 않고, 일단 달려가서 해결을 하셨다.
강물이 아닌 작은 개울은 거머리가 산다. 거머리가 달라붙으면 붙잡아 뗄수록 악착같이 더 깊이 살을 파고드는데 하필 어린 나에게 거머리가 달라붙었다. 피는 흐르고 울고불고 아이들이 좀처럼 빼 내질 못하는데 이웃집 아주머니는 빨래를 하시다가 그것을 또 해결 해 주셨다.
이렇듯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같이 아이들을 위험에서 서로 지키고 서로 구하면서 키웠다. 집안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 동네에서 아이와 어른이 같이 살면서 좋은 것을 많이 배운다. 어느 집 아랫목에 동네 아이들이 모이면 형제가 되고, 귀한 음식이 생기면 꼭 이웃에 나누었다. 심지어 우리 조상 제사를 지내도 인근에 방경 몇 몇 미터까지는 제사음식을 돌렸으니 누구네 할아버지 제사가 언제인지 동네 사람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
설령 교육이 잘못 된 아이가 있더라도 마을에 들면 흡수되어 사람 도리와 의리를 배우고 바로 잡아져 모두 사람구실을 하였으니 엄마가 혼자 애걸복걸 하지 않아도 아이들 교육이 저절로 되었던 것이다.
지금 문 닫아 걸고 방 한 칸씩 차지하고는 폰을 손에 들고, 엄마와 아빠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싫어서 부모가 문도 못 열게 하는 아이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그렇게 자라서 성인이 되면 부모와 떨어질 궁리부터 한다. 가족이라야 부모와 아이 하나, 달랑 3명이다. 이 속에서 아이가 보고 뭘 느끼고 뭘 배우라는 것인가?
가족이 3명, 그 마저도 아빠 엄마가 모두 돈 벌로 나가고, 아이는 남의 손에서 산다.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할머니가 ‘아이구, 내 새끼 우쭈쭈...’ 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가 안아 주고 밥 주고 간식 주는 집이 아니다.
나 어려서 우리 오남매 학교 갔다가 집에 가면 엄마가 잡채도 하시고, 찐빵도 찌고 있고, 벼라 별 종류의 떡도 하시고, 다양한 붙임개도 자주 만들어 주셨다. 옷도 만들어 주시고, 수도 놓고, 뜨개질도 해서 가족을 입히셨다. 엄마가 김장을 하면 온 가족이 같이 붙어서 했다. 마을 사람들도 달려와서 도왔다. 밭과 논에다가 넣을 풀을 벨 때는 온 동네 남자들이 모여서 한 집, 한 집 품앗이로 다 해결 해 주었다.
우리는 다시 거꾸로 세월을 돌려야한다. 진정으로 절실하게 돌아가야 한다. 내가 고향에 가서 시낭송 하며 울컥 하니까 울 어머니는 나에게 ‘ 너는 어렸으니 좋은 것만 기억하는데 난 어른이라 그렇지 않아, 부엌은 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연기 때문에 눈물 찔끔 거리면서 밥을 짓던 곳이고, 강물에 가서 겨울에 고무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얼음 깨고 빨래해서 이고 오던 곳이고, 물이 없어서 물을 길러 먹던 곳이라서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는 곳이야.’ 라고 하셨다.
그 말씀도 맞는 말씀이다. 하지만 좋았던 것을 빼고 말씀 하시는 것이었다. 뭐든지 다 불편했다는 것이 사람을 지치게 하고 힘들게 했고, 좋았던 것도 묻어버리셨다. 지금 불을 때서 밥을 하지 않고, 세탁기가 빨래를 하더라도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전통과 좋은 풍습을 이어 갈 방법을 모색해 보지 않으면 너무나 삭막한 나라로 굳어져 갈 것이다. 건강에 가장 좋은 온돌방, 세계에서 우리 밖에 없는 온돌방 문화를 파묻어 버려선 안 된다. 어떠한 건물을 가지고 우겨도 결국 우리 한옥만큼 과학적인 집은 아직 없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옷은 우리나라 한복이다. 온 마을 사람이 아이 하나가 잘 되면 같이 잔치를 했고, 같이 박수를 쳤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온 마을이고, 온 집안 친척들이라서 아이가 바르게 가고자 스스로를 다지고 다듬고 분발하고 용기를 얻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혼자 잘 먹고 살려고 목표를 세워 성공한 사례는 없다. 고생하던 부모님, 할머니, 또는 형제를 위하여 이를 악 물고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들이 이 나라를 이 만큼 놀랍도록 발전을 시켜 놓았다. 그 힘은 공동체 마을에서 탄생한 것이고, 대가족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고 눈 맞추어 온 우리 민족이기에 이런 성과를 이룬 것이고, 다른 세상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고 놀라고 있다.
우리는 농경시대를 거쳐 오면서도 하얀 옷과 검정 옷을 입었던 멋을 아는 백의민족이다. 옛날 사진들을 보아서 알 것이다. 검정과 하얀 옷을 즐겨 입은 동쪽의 멋쟁이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자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공기놀이, 썰매놀이, 썰매 만들기, 바람개비 돌리기, 오자미 놀이, 고무줄놀이, 물놀이,... 이 좋은 놀이를 요즘 누가 어느 아이가 하고 있는가?
내 새끼만이 아니라 동네 아이들이 모두가 바르게 즐겁고, 모두가 바르게 커야 나라 전체가 좋은 나라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 절실하게 실천하며 살아온 우리 민족이다. 사람은 그룹을 지어서 한 덩어리가 되어 돌아가지 않으면 자살과 우울증과 고독사가 계속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아이를 출산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자식한테 돈으로 다 해 주는 것이 가장 잘 하는 부모노릇일 것이라고 착각들 하고 살아간다. 가난한 나라에서 정신없이 부자 나라로 달리느라 한참을 거꾸로 가고 있어도 몰랐다. 이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 큰 슬픔이다. 이 사실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현실도 큰 슬픔이다.
훌륭하고 좋은 것을 잃어버리고 너무 멀리 강을 건너 왔으니, 국가 정책적으로 수습하지 않으면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 이제라도 우리가 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살아가는지를 절실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때이다. <저작권자 ⓒ 다경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이윤정 시인 관련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