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아직 이불을 덮은 채 잠자리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면서 눈을 떴다 감았다 한다 양 쪽 문을 열어 놓아서 그런지 빠른 걸음으로 바람은 실내공기를 시원하게 하는가 싶더니 이내 서늘하게 변해버리고 나는 데워달라는 듯 앙앙거리는 살갗을 하고 있다.
그럴 때 나는 내자에게 물어 본다 좀 춥네 문 하나는 닫아도 되지 않을까? 현관문 닫을까 아니면 발코니 문 닫을까 하니 내자 왈 “그냥 둬 아들이 덥다고 하잖아” 한다.
한 번은 컴퓨터를 연결하고서는 인터넷으로 상큼 모드로 음악을 듣고 있다 그때 조반을 준비하던 내자가 텔레파시도 없이 다가와서는 나의 방문을 “소리 좀 낮추라”는 말과 함께 조용히 닫고서는 주방으로 간다 “왜 그래 여보” 하는 필자의 말에 내자는 “아직 저 방에 아들 자고 있잖아” 한다.
어느 늦은 밤 아들은 이미 잠들어 있다 불이 켜진 채로 말이다 화장실 다녀오던 필자가 아들방 불을 끄니 꿈속나라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어야 할 내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왜 끄는가 아들한테 모기 달려들까 봐 일부러 켜놓은 건데”라고 한다.
밤이 깊어 깜깜한데 거실만은 환하다 잠자리에 드는 내자에게 거실 불도 꺼야지라고 말을 건네자 내자는 “아들이 아직 안 들어왔는데 어두우면 안 되잖아” 한다.
언재부터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늦어도 열 두 시 전에는 수면에 들어가기로 하는 것이 우리 부부가 하는 건강을 위한 행위 중의 하나다.
그런데 열 두 시는 고사하고 시계 바늘이 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주방에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는 내자를 볼 때가 있다 내자를 향해 나지막이 말한다 “수면부족은 과로의 근원! 늦어도 열 두 시에는 자기로 한 약속 기억하지? 자야지“라고 말이다.
그러면 “아들 들어오는 거 보고 자야지”라고 하면서 내자는 건강을 위한 약속도 물리치면서 과로도 기꺼이 감수한다.
언젠가는 “복숭아가 벌써 나왔길래 사 왔어” 하면서 주방에서 열심히 껍질을 벗기는가 싶더니 쟁반에다 복숭아를 가지고 내자는 아들 방에 먼저 들어간다 남편에게 복숭아 접시를 들고 나타나는 건 그 후의 일이다.
아내의 삶을 지탱하는 1순위는 누구인가?를 알아맞히는 퀴즈놀이를 우리나라의 가정에서 한다면 이런 결과를 보게 되는 거란다.
개다? 땡
고양이다? 땡
친정 부모형제다? 땡땡
남편이다? 땡땡땡
자식이다? 딩동댕
아내의 삶을 지탱하는 “1순위는 자식” 으로 해서 뒤로 밀리는 남편 이야기다.
요즘 우스갯소리에 “자식이 서울대 들어갈 수만 있다면 살인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게 한국 사회의 어머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웬만해서는 알고 있지 싶다.
거짓말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만 놓고 본다 해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 그 끝은 어디일까? 끝이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정녕 오는 곳이 어디일까? 어머니의 그 사랑, 나면서부터 가지고 아니면 살면서 습득되는 것인지 필자 역시 같이 아이 키우는 아버지이긴 하지만 헤아리는 것도 짐작하는 것도 단지 감탄하고 있을 뿐 가능하지가 않다는 생각에 바로 도달하고 만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이없는 사랑의 한 가닥은 사회성을 길러주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세상은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있지만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 안 될 때 누군가를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받아주는 아량을 동원하는 것이 행복 평수를 넓히는 길이라고 일러주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 보이는 것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법의 하나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사실 성경도 참는 것, 오래 참는 것, 모든 걸 참는 것이 사랑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불경도 누군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때 이뻐해 주는 것과 누군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을 때 가여워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우리들을 안내하고 있지 아니한가?
가까이서 부모님이라든가 음식을 만들거나 누군가 길거리에서 손수레를 끌고 갈 때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의 근육과 거들고 싶어 하는 마음의 근육이 자랄 수 있도록 무공해 거름을 듬뿍뿌려 주는 거 말이다.
이웃의 불편함이 “나만”이라는 뿌리에서 발원한 것일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치심이 자랄 수 있도록 자양분을 공급하고 나만에서 “나우선”으로 나우선에서 “함께”로 사고의 틀이 이동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 말이다.
2400여 년 전 아테네에서 제일로 높은 언덕에 올라서 소리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던그리스의 현자 소크라테스를 상상해 본다.
언덕에 올라 그가 정작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던 메시지도 황금을 모으는 것도 아닌, 일류대 들어가는 것도 아닌, 염치를 실천하고 공존의 사회성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식 향한 부모들의 최대의 사랑법이다라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필자 주변만 해도 자식에게 빠져 남편은 뒷전인 아내, 봉사하러 다닌다고 남편은 뒷전인 아내, 취미생활 한다고 남편은 뒷전인 아내로 해서 울화통 치밀어 살고 싶지 않다는 남자가 있다.
그럴 것 같으면 지금 그이와 같은 이들에게는 미안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화내지 않고 살기로 한다 내자의 우선순위가 아들에게 넘어간다 할지라도 말이다.
비록 내가 선순위의 아들 녀석에게 밀려난 후순위일망정 뒷전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안도감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자가 1년에 한 번 정도는 필자에게 “당신은 우리 집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랍니다”라고 표현함으로 해서 효험이 결코 가볍지 않은 ‘말 보약’을 필자에게 먹여 주니 말이다.
추석이 오고 이맘때쯤이면 우리는 생각나는 게 있다 부모님이 그리워 고향땅 노래를 적어 본다.
고향땅이 여기서 몇 리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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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너머 또 고개 아득한 고향 저녁마다 노을 지는 저기가 거긴가
전정주 경북로스쿨 교수 <저작권자 ⓒ 다경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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