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현대 여성들은 명품으로 사치를 표출하고, 조선 시대엔 왕실과 귀족 세도가의 아내들이 가체라는 덧 된 머리로 부를 뽐냈다합니다. 가체는 다른 말로 ‘다리’, 또는 ‘다레’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가체를 구입코자 논과 밭을 팔고 집까지 팔았다고 합니다.
가체는 몽골과 중국에서 흘러 온 풍습이고, 고려시대에도 가체의 풍습은 있었으나,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가체는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 부녀자들도 따라 하기 시작하여 부녀자 수식의 절대적인 조건이 되었습니다.
'성종실록'에는 사람들이 고계(高髻)를 좋아하여 사방의 높이가 한 자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가체의 높이가 여성의 신분 지위를 나타내는 의미로 변질이 되어, 얹은머리를 더 높게 하다가 보니 무게가 사고를 부를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1749년(영조 25년) 기록에 따르면 궁중에서 머리카락을 사방 1척(약 30㎝)으로 높인 이가 있었을 정도였고, 다리를 넣어 머리를 풍성하게 꾸미는 유행은 연산군 때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연산군은 1502년 공주를 위한 의례에 쓴다는 이유로 다리 150개를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머리 사치를 위하여 가산의 탕진은 물론, 나이 어린 신부의 방에 시아버지가 들어오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머리 무게에 눌려 목뼈가 부러져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며느리 가체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신랑 측 집안에서는 혼례를 치르지 못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부작용을 보다 못하여, 영조 임금 때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용하게 하는 가체금지령을 내려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예장할 때 꾸미는 머리 모양에 계속 가체가 사용되는 등 금지령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정조 때 다시 사대부의 처첩과 여염의 부녀는 가체는 물론 본 머리에 다리(다레)를 보태는 것도 금지하고, 천한 신분의 여인은 머리를 얹는 것은 허용 하되 다리를 드리거나 더 얹는 것을 금하는 내용의 금지령을 내렸으나, 이 또한 실천이 되지 않다가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라지게 되었다합니다. 화가 신윤복이 가체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왕실여성들의 가체를 담당하였던 공무원이 바로 희빈 장씨(본명 장옥정)입니다. 장희빈은 천민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국모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었지요. 가체를 담당하다가 나중에 왕실의 화장품과 화장술을 담당하였고, 실력을 인정받아 왕실의 패션디자인까지 요즘으로 치면 토털 뷰티 전문가 자리에 있었으니, 그녀 자신의 용모는 과히 짐작 할 만하지요? 장옥정은 시기와 질투를 많이 받고, 쫓겨 날 위기를 격지만, 미인계를 획책한 남인 일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여기에 숙부 장 현의 재력이 더해지면서 그녀는 엄청난 파워를 불러와 나중에 경종의 어머니가 됩니다만, 오빠 장희재가 군기시 앞에서 목이 잘리고, 세자를 두고, 그녀는 43세의 젊은 나이에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납니다. 장희빈의 묘소엔 저도 두세 번 가 본 일이 있습니다만, 장희빈의 시신은 1702년(숙종 28년) 1월 양주 인장리에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년)에 불길하다는 이유로 광주 진해촌으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1960년대 초 도시개발의 광풍에 밀려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경내로 이전되었습니다. <저작권자 ⓒ 다경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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